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갈리폴리 전투 (문단 편집) === [[다르다넬스 해전]] === Battle of Dardanelles Narrows [[파일:external/www.wwitoday.com/5386-150-dpi-Dardanelles-fort.jpg]] [[오스만 제국군]]의 포격 다르다넬스 해협에는 [[독일 제국군#독일 제국 육군|독일 제국 육군]] [[대장(계급)|대장]] 잔더스 장군이 바로 이 차낙칼레 주둔 오스만 육군의 사령관으로 있었다. 그러나 오스만 육군 장병들은 잔더스 장군을 그다지 따르지 않았고, 오스만 제국의 무스타파 케말 육군 [[대령]](훗날의 [[아타튀르크]])이 잔더스 장군의 지휘안을 잘 조율하면서 [[참모장]] 격으로 오스만 육군을 잘 다독였기에 그가 사실상 사령관이나 다를 바 없었다. 잔더스 장군도 이 30대 후반의 젊은 대령을 꽤 높이 평가했다. 상륙 당일인 2월 19일, 영국과 프랑스 연합함대가 요새를 공격했지만, 이미 이곳을 요새화한 잔더스 장군의 지휘 아래 오스만군의 요새 [[해안포]]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한다. 결국 일주일간 포격전 끝에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 전함 3척이 침몰하고 다수의 [[순양함]] 등이 격침당해 피해가 상당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연합군 함대가 입은 피해의 다수는 포격이 아닌 [[기뢰]]에 의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오스만군의 포격이 무력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연합군 해군도 오스만군이 해협에 잔뜩 깔아둔 기뢰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당시 기뢰 제거를 담당한 함선들은 '''징발된 민간인 함선들에 민간인 선원들이 담당'''하고 있었고, 이들이 오스만군의 포격에 겁먹고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기뢰 제거는 영영 불가능해지고 만다. 결국 카든 제독이 작전 실패의 책임을 지고 교체되었으며, 다시 3월 18일 2차 공격을 시도했으나 이 역시 16척 중 5척이 침몰하는 참담한 실패였다. 결국 이번에는 영국 함대 총사령관 [[존 피셔|피셔 제독]]이 처칠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사퇴해버렸고, 당연히 처칠도 그 책임을 물어 잘렸다. 물론 해군의 포격으로 오스만 육군 역시도 피해가 적지 않아 그대로 밀어붙이면 싸움을 해볼 만했으나, 처음 처칠이 강행했을 때부터 해군 단독작전이었기 때문에 '''상륙할 육군 자체가 없었다.''' 뒤늦게 영국 육군 중동사령관 해밀턴 장군이 해군을 도와 진격한다는 육해군 연합작전으로 변경한 것이 이미 1차 공격이 실패한 3월 12일이었고, 준비 부족 때문에 2차 공세가 실패할 때에는 병력 자체가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결국 상륙작전은 4월 25일에나 펼쳐졌고, 오스만 제국군은 병력을 회복할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 이 전투를 [[다르다넬스 해전]]이라고 부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